-큰 꿈-
살아가다보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이 태어나면서부터의 환경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으며, 살아가면서의 도전에의 한계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외부로부터의 것이기도 하고, 내부로부터의 것이기도 하다.
아무리 뛰어 넘으려해도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힐 때, 그리고 쓰러지고 또 쓰러져 다시 일어설 힘조차 생기지 않을 때, 그 때 겸허히 하늘을 바라보며 우리는 “운명”이라는 것과 대면하게 된다. 하나님, 나는 여기까지 입니까?라고 통곡하며 흐느끼는 내면의 소리가, 어릴 때 품었던 소망의 목소리를 잠재우며, 또다시 두려움으로 과거로 나를 이끈다.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 둘씩 환상이었던 것으로 바뀔 때쯤이면, 살아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는 말이 입술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기 마련이다. 이른 새벽 모두가 자고 있을 때 조용히 어둠을 가르며 전철에 몸을 싣고 하루를 성실히 시작했건만, 그리고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에도 묵묵히 ‘성실을 이기는 것은 없다’며 ‘뿌린 데로 거둔다’는, 이 우주의 대명제에 복종하며 하루하루에 혼을 담아 살아왔건만, 크게 변하지 않는 이 ‘현실’이라는 벽과 마주칠 때, 정말 ‘죽음’을 생각해 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하늘의 별처럼 많이 품었던 그 희망들이 하나둘씩 별똥별로 바뀌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을 볼라치면, 그것이 부도수표를 남발한 사람에 의해서건, 내안에 들끓었던 욕심에 의해서건, ‘생과 사’는 분명 현실일 것이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정직하게 살아가야 한다.
앞서 살다간 많은 선배들이 그렇게 말했다.
“아파 눈물 흘리는 것은 스스로의 몫이라고...”
아파 눈물 흘리지 않아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디 나 하나만 그렇겠는가. 때로는 자식을 위해서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꾸역꾸역 넘어가지 않는 밥을 삼켜야 할 때가 있는 것처럼, 자신과 타인에 대한 배신으로 주먹쥘 수 없을 정도로 온몸에 힘이 빠졌을 때조차도 묵묵히 하루를 살아가야 한다. 비록 모든 것이 헛될지라도...
‘생명으로의 도리’와 ‘삶으로부터의 책임감’이 우리를 ‘소통과 공감’으로 이끄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살아 있음을 ‘재해석’하게 만들고, 살아가야 함을 ‘존재로부터의 자유’인 '당위'로 만드는지 모른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멋도 모르고 달달 외웠던 윤동주의 ‘서시’가 오늘따라 더욱 내 가슴을 여미게 만드는 것은,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간절한 바람이, 그래도 또 뛸 힘을 달라는 간절한 바람으로, 포기하고 싶은 마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갈망함이 아닐까 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